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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92년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인 한양에 도읍을 정했다. 조선왕조의 영토는 오늘날의 북한과 대한민국을 포함하는 한반도 지역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이 확정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성리학을 사회·철학적 지도 이념으로 선택하고 주요 경제 및 행정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조선 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사찰의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여 조선 사회 내에서 불교의 종교적 권위가 실추되고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이 1443년에 한글을 창제하였으나 양반들과 왕실에서는 한자를 주요한 기록 언어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한글의 사용이 활발해졌다. 1592년(선조 25)에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1598년까지 지속되며 조선의 토지가 황폐해지고 사회가 혼란해졌다. 또한 후금이 침입한 1627년 정묘호란과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침입한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해,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가 되고 명과의 국교 단절을 강요 받았다. 1897년 고종(재위 1863~1907)이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선포하고 자주독립국가의 황제가 되었는데, 1905년 고종 황제가 비준하지 않았음에도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 및 집행하여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으며 일본통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10년에는 일본이 한일합병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고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를 지속했다. 조선 사회에는 철저한 신분제 질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각 계층 안에서의 신분적 지위 변동은 가능했지만 사회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와 사회 최하층인 천인 노비, 그리고 그 사이에 중인과 상민 계층이 엄격히 구분되었다. 18세기에 농민층이 분해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는 사회 변화와 더불어 사회개혁사상인 실학이 등장해 성리학의 한계를 비판 및 극복하고 통치 체제를 개선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들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실학자들은 토지제도와 수취체제를 개혁하고 농업경영을 개선하며 상공업을 진흥할 대책을 연구하고 제시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미의식의 영향을 받은 미술이 발전을 거듭했다. 양반들은 중국의 화풍을 수용한 문인화, 특히 산수화를 그렸다. 고려청자로부터 탄생한 분청사기가 15~16세기에 해당하는 약 200년간 제작되었고 이어 백자와 청화백자가 만들어졌다. 성리학에 기반한 철학적 사고를 가진 사대부들은 검소한 미적 취향을 지녔으며 백색이 상징하는 결백함과 질박함을 아름답게 생각했다.
11945년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제2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따라 오늘날의 대한민국(이하 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으로 나뉘었다. 제2차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38°선 이북과 이남에 각각 점령군을 보내 군정을 시작한 소련과 미국 사이에 냉전 체제가 고착화됨에 따라 남북을 통합하여 하나의 정부를 세우기 위한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하에 38°선 이남 지역의 단독총선거가 시행되었고 8월 15일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같은 해 9월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을 선포했다.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별개의 정부를 수립한 상황에서 1950년 6월 25일 중국과 소련의 군사 원조를 받은 북한이 남침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남한은 미국과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였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비무장지대가 설정되었다. 38°선 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여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분단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전통 미술과 공예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선전하는 미술을 지원하며, 만수대예술단을 통해 공연 예술 뿐만 아니라 회화와 조각을 포함하는 시각 예술을 제작 및 관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의 문화재를 보호하는 여러 정부 기관과 단체를 설립하고 관련 법령을 제정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출신의 서도호와 같은 현대 작가들이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고(故) 백남준과 같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미술가들도 국제 무대에서 명성을 얻었다.
1가장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으며, 전성기에는 그 국경을 북쪽으로는 아무르강(헤이룽강), 남쪽으로는 한강까지 넓혔다. 고구려는 만주지방에 위치한 졸본성(卒本城)에서 압록강 근처의 국내성(國內城) 그리고 427년에 다시 오늘날의 평양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천도했는데, 이는 경작이 용이한 남쪽의 비옥한 땅을 점유하고 한반도에서 세력의 우위를 점하겠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압록강과 평양 근처에서 발견된 다수의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삶을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
1가족사진1900년대
1고대 국가로 정착하지 못했던 가야는 2∼3세기에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12개 소국들이 합친 전기 가야연맹체를, 5∼6세기에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22개 소국을 아우르는 후기 가야연맹체를 성립했다. 동쪽으로 신라와 서쪽으로 백제에 맞닿아 있었으며, 낙동강 중·하류의 서쪽 지역 일대를 점유했다. 4세기 말 고구려군의 낙동강 하류 정벌로 인해 가야는 영토가 축소되는 등 침체기를 겪었으며, 562년 결국 신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가야는 우수한 제철 기술을 보유하여 최상급의 철제 무기와 갑주를 생산하였으며, 한반도 각지 및 일본에 철을 수출했다.
1구부(口部)가 외반되고 가장자리가 둥글게 말려 있는 원형의 접시가 속이 빈 다각기형의 굽다리 위에 올려진 백자 제기이다. 접시 부분과 굽다리는 따로 성형한 후 부착했다. 엷은 회청색을 띠는 유약이 시유되었으나 상태가 고르지 못하고 드문드문 기포가 보인다. 굽 접지면에 굵은 모래받침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안쪽 바닥에도 비슷한 모래받침의 흔적이 보여 이 굽다리 접시는 동일한 몇 개의 도자기와 묶음으로 포개어 번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굽다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형태이다.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제수(祭需: 제물)로 올릴 떡과 같은 전통 음식을 이러한 제기에 정갈하게 담았다. 한국에서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모시는 제사는 그 기원을 성리학적 이념이 사회와 문화의 근간을 이룬 조선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성리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성공적인 국가 통치는 가정을 잘 다스리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며, 그 근저에 효라는 덕목이 있다. 사람들은 집안의 살아 계신 어른들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께도 존경을 표했는데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도리를 지켰다. 1474년 조선의 왕명으로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다섯가지 의례의 예법과 절차를 규정하였다. 그 중 제례는 음력을 따르는데, 제사에 대해서는 4대조까지의 기일에 사당에서 지내는 기제, 3월과 10월에 조상의 묘에서 지내는 묘제 그리고 설날, 한식(寒食), 단오, 추석 등의 명절에 지내는 차례를 설명하였다. 제사에 참여하는 후손들은 하루 전에 재계(齋戒)하고 제사 지내는 날 새벽에 제사상을 차린다. 다양한 종류의 제사 음식을 배열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시이(棗栗枾梨), 생동숙서(生東熟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건좌습우(乾左濕右), 반서갱동(飯西羹東).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은 향을 피우고 술을 따라 조상의 혼을 모시고 초헌, 아헌, 종헌의 세 차례에 걸쳐 술을 올리고 중간에 축문을 읽는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문을 닫고 나와 조상님이 음식을 흠향할 수 있도록 잠시 기다린 후 다시 들어가 나머지 절차를 끝내고 지방(紙榜)과 축문을 불사른 뒤 제사에 올린 음식과 술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
1발해(渤海, 698년 ~ 926년)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대조영이 건국한 국가이다. 발해의 건국으로 정식적인 남북국 시대가 열렸는데, 남국은 신라, 북국은 발해를 지칭한다. 이후 228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및 연해주에 걸친 지역에서 존속하였다. 수도는 발해 성왕 이후로 상경 용천부였다. 발해는 초기에 진국이라고도 불렸으며, 해동성국이나 고려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 당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탈출하였고 698년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세력을 기반으로 대조영이 동모산 부근에서 건국하였다. 발해는 강한 군사력과 발전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영토를 확장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건국할 당시 대조영은 스스로 나라의 이름을 진국(震國)으로 정하고, 그 후에 713년 당에게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명목상 책봉된 후로는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고려라는 국호도 사용하였는데,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고, 일본도 발해를 고려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926년 발해는 갑작스레 멸망했는데 그 이유에는 백두산 폭발, 요 태조(거란)의 침입, 지도층의 내분 등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고 있다. (Wikipedia, 2017)
1백제는 한반도 중서부 지방에 위치했으며, 4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첫 수도인 한성(현재의 서울)에서 475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고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그리고 다시 538년에 사비(현재의 부여)로 천도했다. 백제는 지리적인 이점 덕분에 해로(海路)를 통한 대외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져 경제가 번영하고 문화가 융성했다. 백제는 불교를 포함해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다양한 문물 및 기술을 왜(일본)에 전했다. 왕족은 불교를 후원하고 금속공예와 토기의 발달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삼국시대의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동남부 지역을 통치했다. 인접한 국가들과 왜구와의 잦은 충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가야연맹체의 영토를 정복하고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점령했다. 왕족과 귀족의 후원으로 신라에서는 금동불상과 석불이 발달했다. 잘 보존된 왕릉에서 금으로 된 부장품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는 강력했던 왕권의 존재를 시사한다.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를 각각 562년, 660년, 668년에 멸망시키고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이르는 영역을 확보하여 통일 왕조로서 한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1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668년에 삼국통일을 달성하여 한반도의 대부분 지역을 첫 단일 왕조로서 지배하게 되었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연해주 지역의 영토를 다스린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주도적으로 건국한 국가로서 고구려 장수였던 대조영을 1대 왕으로 하여 698년부터 926년까지 존속했다. 7세기에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당을 몰아낸 후에 신라는 당과 긴밀한 교류 관계를 이어 나갔다. 통일신라 시기에 중국과의 해상 교역이 활발해지고 실크로드를 통한 대외무역도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도 동서간 문물 교류가 가능하게 되었다. 유교는 도덕정치의 이념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중국의 제도를 본떠 682년에는 국가교육기관인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경전을 가르치고 788년에는 국학생들의 학력을 시험하여 관직을 하사하는 제도인 독서삼품과를 시행했다. 7, 8세기에는 신라의 승려들은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위해 중국과 인도로 유학을 하기도 했으며, 불교는 왕실과 귀족 그리고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 사회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불교가 융성한 덕에 많은 사찰과 탑파가 건립되었으며, 신라의 독특한 미감이 잘 발현된 불상과 각종 석조물 및 공예품이 또한 제작되었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왕권의 약화, 중앙 정계 귀족들의 분열, 지방 호족들의 성장으로 큰 혼란을 겪다 935년에 고려에 항복하는 것으로 신라는 쇠망했다.
1왕건이 918년에 고려를 건국하고 935년과 936년에 차례로 신라와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신라 시기의 신라와 비교해 고려는 오늘날의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위치한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편의상 고려시대를 초, 중, 후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고려 전기는 918년부터 1170년에 이르는 시기로 왕건이 출신지인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호족 세력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왕권을 강화했다. 동시에 특정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막고 새로운 관리들을 등용하기 위해 당나라의 과거제를 도입하여 실시했다. 1170년부터 1270년에 해당하는 고려 중기에는 무인들이 무신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농민과 천민이 봉기를 일으켰으며 또한 몽골이 침입하여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졌다. 1270년부터 1392년까지의 고려 후기에는 왕실이 원나라에 예속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간섭을 받았다. 홍건적과 왜구가 침입하고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가 대립하는 가운데 후에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고려 왕조는 막을 내렸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교로 삼은 왕실과 귀족의 지원으로 관련 공예품의 제작이 증가했다.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불경(佛經)의 출판도 활발하여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과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만들어졌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품의 종류에는 사찰에서 사용했던 의례 용구, 불화, 금속공예품, 칠기와 도자기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고려청자는 11세기 초반과 13세기 초 사이에 기형, 문양, 번조수법이 완성되고 특히 12세기 중반에는 상감청자가 제작되며 기술이 최고의 경지에 달했다.
1이 거울은 꽃잎이 여섯 개인 꽃 모양으로 주조되었다. 거울 뒷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돌리고 가운데에 꼭지(鈕)를 달았다.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다. 꼭지에 뚫린 구멍을 통해 끈을 달아 거울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장식된 거울 뒷면 반대편의 거울면은 녹이 슬어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광택을 잃었다. 고려시대에 거울은 화장 용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꼭지의 일부가 결실되었다.
1이 백자 병은 구연이 밖으로 벌어져 있고 목이 길며, 몸체는 구형(球形)을 이룬다. 몸체에서 굽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음각선이 있고, 굽은 접지면을 향해 약간 좁아든 형태이다. 회색을 머금은 맑은 유약을 전면에 고르게 시유했고, 몸체 표면에 마모의 흔적이 있다. 굽 접지면의 표면을 문질러 번조시 사용한 받침 자국을 없앴다. 이 백자 병은 문양이 없는 조선시대 자기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백색의 순정함과 장식의 절제는 조선왕조의 근간인 성리학적 이념을 반영하였으며, 특히 성리학이 추구하는 검소함과 단정함을 상징하는 전형으로 여겨졌다. 제례에 사용하는 순백자 제기는 다양한 형태로 대량 제작되었다. 이 병은 술이나 물을 담는 제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모시는 제사는 그 기원을 성리학적 이념이 사회와 문화의 근간을 이룬 조선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성리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성공적인 국가 통치는 가정을 잘 다스리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며, 그 근저에 효라는 덕목이 있다. 사람들은 집안의 살아 계신 어른들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께도 존경을 표했는데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도리를 지켰다. 1474년 조선의 왕명으로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다섯가지 의례의 예법과 절차를 규정하였다. 그 중 제례는 음력을 따르는데, 제사에 대해서는 4대조까지의 기일에 사당에서 지내는 기제, 3월과 10월에 조상의 묘에서 지내는 묘제 그리고 설날, 한식(寒食), 단오, 추석 등의 명절에 지내는 차례를 설명하였다. 제사에 참여하는 후손들은 하루 전에 재계(齋戒)하고 제사 지내는 날 새벽에 제사상을 차린다. 다양한 종류의 제사 음식을 배열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시이(棗栗枾梨), 생동숙서(生東熟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건좌습우(乾左濕右), 반서갱동(飯西羹東).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은 향을 피우고 술을 따라 조상의 혼을 모시고 초헌, 아헌, 종헌의 세 차례에 걸쳐 술을 올리고 중간에 축문을 읽는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문을 닫고 나와 조상님이 음식을 흠향할 수 있도록 잠시 기다린 후 다시 들어가 나머지 절차를 끝내고 지방(紙榜)과 축문을 불사른 뒤 제사에 올린 음식과 술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
1이 병은 목이 길고, 몸체의 무게 중심이 아래에 있으며 하단이 풍만하고 낮은 굽이 달려 있다. 구연이 살짝 외반되고 가장자리가 바깥으로 말려 도톰하게 마무리되었다. 옅은 청화 안료를 사용하여 어깨에 추상화된 풀 무늬의 문양대를 두르고 몸체에는 풀꽃 무늬를 그려 넣었다.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회청색의 빛깔이 감돌고, 시유상태가 고르지 못하다. 굽 접지면 및 바닥에는 모래를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입구의 상당한 부분이 결실되었다.
1이 숟가락의 본체는 길쭉한 타원형이며 끝이 뾰족해 버들잎모양(柳葉形)을 연상시킨다. 크게 휘어진 자루는 옆면의 모양이 S자형이고 윗면은 둥글며 선문을 음각해 장식했다. 자루는 점점 얇아지며 끝이 두 갈래로 나뉜 제비꼬리모양(燕尾形)을 이룬다. 숟가락은 녹이 슬었고 표면의 일부가 검은색을 띤다. 휘어진 모양과 자루 끝의 제비꼬리 형태를 보아 이 숟가락은 고려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젓가락을 사용하는 중국·일본의 관습과 달리 한국에서 숟가락은 주요의 식기로 국물과 밥을 먹는 데 사용되며, 젓가락은 일반적으로 반찬을 집어 먹는 데 사용되었다. 식사할 때 금속으로 만들어진 숟가락과 젓가락(수저)을 병용하는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 왔다.
1이 유물은 뚜껑이 있는 항아리로 구부가 직립하고, 몸체가 구형(球形)에 가까우며 접지면을 향해 약간 좁아든 납작한 굽이 달려 있다. 몸체에서 굽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약간의 음각선이 새겨져 있다. 약간 어두운 색조의 청화 안료를 사용하여 구부와 몸체가 만나는 부분에 선을 한 줄, 어깨부분에 선 두 줄을 두르고, 그 사이에 도안화된 풀 무늬를 그려 넣었으며, 그 아래 쪽(항아리 상부)에 자유롭게 그린 두 개의 풀 무늬를 병치했다. 항아리 전면에 청색을 띠는 유약이 시유되었으나 잡물이 많이 보인다. 접지면에 모래를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뚜껑의 윗면이 편평하고 어깨에서 가장자리까지 경사지게 형성하였다. 뚜껑 안쪽에 수직의 드림턱을 두어 항아리 구부에 맞물려 덮을 수 있도록 했다. 바깥면은 청화 안료를 사용해 무늬를 그려 넣었고 청색을 띠는 유약이 시유되었으나 잡물이 많이 보인다. 안쪽면에는 유약이 입혀지지 않았다. 이 항아리는 식재료를 보관하기 위한 일상용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1이 유물은 뚜껑이 있는 항아리로 구부가 직립하고, 몸체가 구형(球形)에 가까우며 접지면을 향해 좁아든 납작한 굽이 달려 있다. 몸체가 구부 밑에서 서서히 벌어져 풍만하고 둥근 어깨를 이루며 저부로 내려 갈수록 좁아지면서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몸체에서 굽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음각선이 있다. 어깨 부분에는 추상화된 무늬를 청화 안료로 그려 넣었다. 바깥면에는 회청색을 띠는 유약이 시유되었으며 안쪽면에는 유약이 입혀지지 않았다. 항아리 표면은 드문드문 기포가 있고 물레질한 흔적이 보여 대체로 투박한 느낌을 준다. 접지면은 유약을 훑어내었고 받침 흔적이 없다. 뚜껑의 윗면이 편평하고 어깨에서 가장자리까지 경사지게 형성하였다. 뚜껑 안쪽에 수직의 드림턱을 두어 항아리 구부에 맞물려 덮을 수 있도록 했다. 바깥면은 청화 안료를 사용해 꾸몄고 회청색을 띠는 유약을 시유했다. 안쪽면에는 유약이 입혀지지 않았다. 항아리와 마찬가지로 기포와 물레질 흔적이 보여 투박한 느낌을 지닌다. 이 항아리는 식재료를 보관하기 위한 일상용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1이 인장의 몸체는 원판형이고 손잡이는 수직의 납작한 판으로 여의두 형태이다. 손잡이 윗부분에 인수(印綬)를 달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인면의 글자들은 금속 조각들을 다듬어 인면(印面)에 납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면에 양각으로 새겨진 네 자 중, 어느 가문의 인장을 뜻하는 씨지인(氏之印)은 판독이 가능하나 어느 성씨인지를 알려주는 첫 글자는 판독이 어렵다. 자체(字體)는 구첩전(九疊篆)이다. 표면이 전체적으로 푸른 녹이 슬었고, 인면의 일부가 녹이 심하게 슬었다. 한국의 인장은 그 기원을 중국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늦어도 한나라 (206 BCE – 220 CE) 시기부터 인장이 사용되고 있었을 만큼 중국에서의 역사가 오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인장들은 삼국시대 (57 BCE – 668 CE)인 3세기경의 것으로, 이 시기부터 인장이 공적 및 사적 문서, 그림, 서예 작품을 보증하고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인장이 있었는데, 하나는 왕, 토지를 소유한 귀족, 관료들이 공적인 용도로 사용한 인장과 다른 하나는 이름, 호 (號), 시나 고전으로부터의 발췌를 새겨 개인의 서명과 다름 없이 사용한 사적 용도의 인장이 그것이다. 고려 시대(918 – 1392) 에는 왕부(王府)의 관인(官印)을 주관하는 관청인 부보랑(符寶郎)을 시작으로 인부랑(印符郞)을 거쳐 상서사(尙瑞司)가 설치되고 관련 업무를 관장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관인은 현재 전하는 것이 없는데, 이는 조선왕조가 1392년에 개창하면서 구왕조의 관인을 폐기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려시대의 개인용 인장들은 다수 남아 있다. 이 인장들은 대체로 청동으로 주조되었고 글자가 새겨진 인면(印面)과 손잡이(紐)로 구성되어 있는데, 손잡이는 그 형태가 간결한 것과 장식적인 것으로 다양하며 고리나 구멍을 통해 허리띠에 매어 달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한자 뿐만 아니라 상징과 기하문양을 새기기도 한 인문(印文)은 판독이 어려운 경우가 많으나, 주로 장수(長壽) 혹은 복(福)과 관련이 있거나 불교적인 내용을 상징하는 도상이 다수이다. 인장들의 정확한 용도에 관하여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편지나 문서를 봉할 때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일본은 아시아 지역을 정복하여 패권을 잡기 위한 발판으로 한국에 대한 지배 야욕을 오랫동안 드러냈다. 1876년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끝내는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또한 체결하여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의 통치 하에서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의 모든 면에서 자주권을 상실했다. 한국민의 독립운동은 20세기 초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그 파급력이 커 이를 계기로 국내외에서 전민족적인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화하면서 한국민족 말살정책과 식민지 수탈정책을 강화하였다. 1938년부터 한국인들은 한국어와 한국 이름의 사용까지 금지당했다. 또한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이 종료되기 전까지 한국인들을 강제 징병하여 최전방으로 내몰고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무보수 노예노동을 강요하였으며 온갖 불법적 방법으로 나이를 불문하고 여성을 일본군위안부로 징집하였을 뿐 아니라, 생체실험에까지 동원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여 한국인들은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펼쳤고 결국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해방을 맞이했다. 1920년대 말부터 한국의 화단에서는 한국 회화만의 독특한 화풍을 창조하기 위한 노력과 서양 회화에서 영감을 얻기 위한 연구의 움직임이 함께 일어났다. 한편, 한국에서의 근대식 고고학적 발굴은 일제강점기 때 처음으로 이루어졌으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일본은 식민사관을 발전시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는 또한 일본에 의해 수많은 한국의 문화재들이 훼손되고 불법 반출되었다.
1작은 항아리는 구연부가 직립하고 몸체가 어깨에서 최대로 벌어졌다가 굽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둥근 모양이다. 몸체에서 굽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음각선이 있다. 어깨에는 청화 안료로 간략하게 그린 두 개의 풀 무늬(난초를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를 병치했다. 담청색을 띠는 유약이 항아리의 바깥면에 시유되었으나 상태가 고르지 못하다. 항아리 안쪽면에는 유약이 입히지 않았는데 유약이 떨어지거나 입에서 흘러내린 흔적이 보인다. 접지면에 내화토 빚음을 받쳐 구운 흔적이 있다. 이 항아리는 양념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장죽의 담뱃대를 문 두명의 낚시꾼이 얼어붙은 강 위에 거죽을 깔고 앉아 얼음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
1전체적으로 작은 원형(圓形)의 청동 거울이다. 거울 뒷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테두리를 돌리고 가운데에 꼭지(鈕)를 달았다. 꼭지와 테두리 사이에 꽃 무늬를 돋을새김하여 장식하였으나 녹이 심하게 슬어 분명히 알아보기 어렵다. 꼭지에 뚫린 구멍을 통해 끈을 달아 거울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거울 뒷면 반대편의 거울면은 녹이 슬어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광택을 잃었다. 고려시대에 거울은 화장 용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1접시 모양의 윗부분과 원통형의 높은 굽다리로 구성된 백자 잔받침이다. 굽다리는 속이 비었으나 바닥은 막혀 있다. 넓은 전으로 돌려진 외반된 구연과 중앙으로 내려오면서 턱이 져 있는 접시 부분은 속이 빈 굽다리와(로) 연결되면서 중앙에 원형 홈을 이루고 있다. 잔받침 윗부분의 오목하게 들어간 모양과 원형의 홈을 통해 굽이 달린 잔이 안정감있게 놓이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연한 회색을 띠는 백자유가 입혀졌다. 굽 안쪽 바닥에는 번조 과정에서 생긴 얼룩과 유약의 뭉침이 보인다. 굽 접지면에 내화토를 받쳐 구운 흔적이 있다. 이 백자 잔받침은 문양이 없는 조선시대 자기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백색의 순정함과 장식의 절제는 조선왕조의 근간인 성리학적 이념을 반영하였으며, 특히 성리학이 추구하는 검소함과 단정함을 상징하는 전형으로 여겨졌다. 제례에 사용하는 순백자 제기는 다양한 형태로 대량 제작되었다. 굽다리가 있는 이 잔받침의 기형은 조상들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며, 이러한 종류의 잔받침은 술잔을 받치는 용도로 조상을 기리는 제사를 지낼 때 제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모시는 제사는 그 기원을 성리학적 이념이 사회와 문화의 근간을 이룬 조선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성리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성공적인 국가 통치는 가정을 잘 다스리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며, 그 근저에 효라는 덕목이 있다. 사람들은 집안의 살아 계신 어른들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께도 존경을 표했는데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도리를 지켰다. 1474년 조선의 왕명으로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다섯가지 의례의 예법과 절차를 규정하였다. 그 중 제례는 음력을 따르는데, 제사에 대해서는 4대조까지의 기일에 사당에서 지내는 기제, 3월과 10월에 조상의 묘에서 지내는 묘제 그리고 설날, 한식(寒食), 단오, 추석 등의 명절에 지내는 차례를 설명하였다. 제사에 참여하는 후손들은 하루 전에 재계(齋戒)하고 제사 지내는 날 새벽에 제사상을 차린다. 다양한 종류의 제사 음식을 배열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시이(棗栗枾梨), 생동숙서(生東熟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건좌습우(乾左濕右), 반서갱동(飯西羹東).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은 향을 피우고 술을 따라 조상의 혼을 모시고 초헌, 아헌, 종헌의 세 차례에 걸쳐 술을 올리고 중간에 축문을 읽는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문을 닫고 나와 조상님이 음식을 흠향할 수 있도록 잠시 기다린 후 다시 들어가 나머지 절차를 끝내고 지방(紙榜)과 축문을 불사른 뒤 제사에 올린 음식과 술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
1청동으로 만든 둥근 거울이다. 거울 뒷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테두리를 돌리고 가운데에 꼭지(鈕)를 달았다. 꼭지를 중심으로 꽃술과 꽃잎을 돌려 만개한 꽃처럼 나타냈고 이어서 거울의 주요 무늬인 칠보 무늬 및 연속된 구슬 무늬 한 줄을 돋을새김하여 장식하였다. 꼭지에 뚫린 구멍을 통해 끈을 달아 거울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거울 뒷면 반대편의 거울면은 녹이 슬어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광택을 잃었다. 고려시대에 거울은 화장 용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1한반도에서 삼국시대는 신라, 고구려, 백제가 각각 서기전 57, 37, 18년에 건국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668년과 660년에 멸망할 때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한편, 경상남도 및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영유한 가야는 서기전 1세기에 등장해 562년에 멸망했다. 삼국은 한반도 전역을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의 영토에 속하는 대부분의 만주지역까지 진출했다.